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역전되는 전세 ==== >관우는 번성(樊城)ㆍ양양(襄陽)을 포위한 이후부터 유봉과 맹달을 여러 차례 불러 병사를 일으켜 자신을 돕도록 했다. 유봉과 맹달은 산속의 군이 막 종속되기 시작하여 동요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관우의 명령을 수락하지 않았다. 결국 관우는 패배했고, 유비는 이들을 원망했다. 또 유봉과 맹달은 다투며 화합하지 못했고,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았다. 맹달은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고, 또 유봉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여 유비에게 표를 올려 이별을 고하고 부하들을 인솔해 위나라로 투항했다. >---- >「유봉전」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군을 여러차례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수락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는 등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 >「관우전」 [[미방]]과 [[사인(삼국지)|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까지 마음대로 취해가면서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조인(曹仁)이 관우(關羽)에게 포위되자, 조조는 서황(徐晃)을 파견하여 그를 구하도록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조조는 직접 남정하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말했다. > >"대왕께서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패할 것입니다." > >환계만은 이렇게 말했다. > >"대왕께서는 조인 등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조조가 대답했다. > >"할 수 있소." > >환계는 또 질문했다. > >"대왕께서는 두 사람이 힘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하십니까?" > >조조가 말했다. > >"아니오." > >환계는 질문했다.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히 가려고 하십니까?" > >조조가 대답했다. > >"나는 적의 무리가 너무 많은데 비해 서황 등의 형세가 불리한 것이 걱정될 뿐이오." > >환계는 말했다. > >"지금 조인 등은 겹겹의 포위속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맹세하여 대왕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먼 곳으로부터 위세를 떨치십시오. 무릇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면 반드시 죽을 각오로 싸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내심 죽을 각오로 싸울 생각이 있다면 밖으로부터 강력한 원조가 있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육군을 인솔하여 여력을 나타내셨는데, 하필 실패를 걱정하여 친히 가려고 하십니까?" > >조조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기고, 군대를 인솔하여 마피(摩陂)에 주둔하자, 적은 곧 철수했다. >---- >「환계전」 8월, 조조는 [[서황]]을 파견하지만 포위를 풀지 못했다. 이에 친정을 나서려 하나 환계만이 반대했다. 조조는 환계의 조언을 듣고 친정을 포기한다. >겨울 10월, 군(軍)이 낙양으로 돌아왔다. >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上書)하여,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효(自效-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함)할 것이라 했다. 왕이 낙양으로부터 남쪽으로 관우를 정벌했다. 미처 이르기 전에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고 관우는 달아나니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왕이 마피(摩陂)에 주둔했다. >---- >「무제기」 >태조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 >“병마(兵馬)가 집결하기를 기다려 함께 전진하라.” > >적은 언성(偃城-번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궤도(詭道-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偃城)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공격하기 전에 태조가 그 앞뒤로 은서(殷署), 주개(朱蓋) 등 모두 12영(營)을 서황에게 보냈다. >---- >「서황전」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淮陰侯 ; 漢信)가 조(造)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오. '''서황(徐晃) 등이 적은 수의 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당신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소.''' 조조는 교활한 적이오. 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이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겼소.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하오. 나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 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소. 나는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나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 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이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오. >---- >「육손전」 10월, 조조는 낙양으로 돌아와 서황에게 [[여건]] 등을 보내며 병마가 집결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서황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육손전」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서황은 마냥 가만있었던 것이 아니라 척후를 풀어 관우의 동향을 지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여건]]이 합류한 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자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고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지원군이 속속히 도착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